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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 中
 
울산 편집부 기사입력  2006/12/06 [22:25]
좋은일은 널리 알리고 부정한 일은 심충탐사 추적 보도한다!



 
     리골레토는 바람둥이..플레이 보이..돈 환..카사노바의 이야기이다....
 
       리골레토가 카사노바가 아니라 그가 섬기는 백작이 카사노바이다...
 
       이름은 만토바 백작.....
 
        리골레토는 꼽추이면서 아주 비열한 추악한..악랄한 인간으로 표현되는데
 
       그가 주인공인 이유는
 
       그의 딸인 질다가 자기가 섬기는 백작에게 넘어가 버리는 비극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비열했는가는 극 초반에 잠깐 나타난다....
 
        어떤 백작이 자기 딸을 농락했다며
 
       만토바 백작에게 와서 항의를 하자..그를 비웃으며..<백작님..이 영감을 감옥에 쳐 넣고 ..
 
       계속 그러면 목을 날려 버릴 까요 ? 하면서 그 백작을 비웃고
 
      모든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그런 비열한 인간이었는데........
 
     
     이 대본의 원본은 <빅톨 위고>의 왕의 환락이란 소설이었는데
 
     당시 왕정 시대에 이 대본을 그대로 상영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서
 
       배경을 이탈리아로 바꾸고 왕의 바람끼를 어떤 백작으로
 
      대신하고.....그러면서 이 오페라는 빛을 보게 된다..
 
     이 오페라에서 가장 히트를 친 곡은 <여자의 마음>이다.....
 
     베르디 자신도 이곡에 가장 자신이 있었는지 이 곡을 부르는 가수에게
 
  < 절대로 이곡을 남들 앞에서 연습하지 말아라.. 이 곡은
 
     분명히 24시간안에 히트를 칠 것이다....>  
 
    실제로 오페라가 시작된지 10일만에 온 도시 사람들이
 
     이 곡을 흥얼거리면서 일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
     

     눈물을 흘리며 방긋 웃는 얼굴로
 

     거짓말로써 속일 뿐이리......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여자의 마음은 변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questa o quella

 

 

사랑의 2중창caronome


 

리골레토[rigoletto]

주세페 베르디(1813~1901)의 3막 오페라.

빅토르 위고의 희곡 〈왕의 장난 le roi s'amuse〉을 바탕으로 f. 피아베가 대본을 썼다. 1851년 3월에 베네치아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한국에서는 1958년 5월 19일 서울 오페라단에 의해 시공관에서 초연되었다. 베르디의 3대 오페라 중 하나이다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16세기 이탈리아의 만토바를 무대로 호색한 만토바 공작은 그의 총신인 곱추 리골레토의 딸 질다를 사랑하고 있다. 그에게 능욕당한 딸을 구출하기 위해 리골레토는 살인 청부업자 스파라푸칠레를 매수하여 공작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공작을 사랑하는 스파라푸칠레의 여동생 막달레나의 반대에 부딪쳐 스파라푸칠레는 밤중에 찾아오는 다른 사람을 대신 죽이기로 한다. 이 사실을 안 질다는 사랑하는 공작 대신에 죽기로 결심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남장을 하고 나타난다. 결국 그녀는 스파라푸칠레가 만든 푸대에 묶여 죽은채로 리골레토에게 인수된다. 그 속에서 죽어가는 딸을 발견한 리골레토는 놀라며 질다의 시체위에 몸을 던진다.」

이 작품엔 만토바 공작의 아리아 <이것도 저것도>·<여자의 마음>, 질다의 아리아 <그리운 그대 이름> 리골레토의 아리아 <그는 살인자>·<정신들이여>·<울어라 내딸아, 눈물로 마음을 씻어다오>, 질다, 만토바 공작의 <사랑의 2중창> 등이 유명하다.
제1막 질다의 아리아 <그리운 그대 이름>(caro nome)는 리리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아리아의 대표적 걸작이다.
「정다운 그대 이름 잊을 수가 없어라. 나의 모든 생각이 그대에게 달려가도다. 내가 살아 있을 동안 언제나 사랑스러운 이름」

세라핀/밀라노 스칼라 극장 o & cho (emi 55)은 무엇보다 전성기의 칼라스, 디 스테파노, 곱비 트리오의 빛나는 가창을 들을 수 있는 음반이다. 곱비(리골레토)는 딸을 빼앗긴 아버지의 심정을 절절히 표현했으며 고뇌에 찬 극적 가창은 강렬한 호소력을 지녔다. 칼라스(질다)는 청순한 서정미는 떨어지나 극적 표현이 뛰어났으며 콜로라투라의 화려한 기교를 과시했다. 디 스테파노(공작)는 서정과 열정이 조화된 미성이며 호색한 공작의 극적 묘사도 훌륭했다. 그러나 세라핀의 관현악과 합창은 평범해 솔로진을 보조하는데 그쳤다.
줄리니/빈 po, 빈 국립오페라 cho (dg 79)은 무엇보다 줄리니의 서정과 열정을 섬세하게 조화시킨 치밀한 지휘가 돋보인 연주다. 여기에 유려한 음색을 지닌 카푸칠리(리골레토), 도밍고(공작)의 열정적 가창이 훌륭했다. 코트루바스(질다)는 서정적 표현은 좋으나 극적인 힘이 부족하며 콜로라투라의 기교도 떨어졌다.
솔티/rca 이탈리아 오페라 o & cho (rca 64)는 관을 앞세운 관현악의 강렬한 극적 박진감이 좋으나 표현의 치밀함이 부족했다. 힘과 열정에 찬 메릴(리골레토)이 좋으며 선이 가늘고 서정적인 클라우스(공작)와 모포(질다)도 무난하다.
쿠벨릭/밀라노 스칼라 극장 o & cho (dg 64)에서 피셔-디스카우(리골레토)는 열정은 다소 부족하지만 부성애에 찬 내면적 심리를 드라마틱하게 노래했고 스코토(질다)는 리릭, 드라마틱, 콜로라투라의 3박자를 겸비한 이상적 질다를 보였다. 베르곤지(공작)는 성격적 표현이 다소 부족했다. 관현악, 합창은 무난하다.
시노폴리/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o & cho (ph 84)는 드라마틱한 극적 효과에 명쾌함을 깃들인 시노폴리의 지휘가 훌륭한 연주다. 브루손(리골레토)은 곱비, 카푸칠리, 피셔-디스카우의 수준엔 이르지 못했으나 괜찮으며 그루베로바(질다)는 콜로라투라 기교를 과시하여 투명하고 서정적 질다를 노래했다. 여기엔 시코프(공작), 파스벤드(막달레나), 로이드(스파라푸칠레)가 호연하고 있다.
근년 로스트(질다), 알라냐(공작), 브루손(리골레토) 주역의 무티/밀라노 스칼라 극장 o & cho (sc 94)의 호평을 받은 실황 연주도 있다.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1935. 10. 12 이탈리아 모데나~.
이탈리아의 오페라 가수, 리릭 테너.

테너의 음역으로 낼 수 있는 최고의 음을 훌륭하게 구사한다. 1955년 모데나의 사범학교를 졸업했고, 2년간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만토바를 중심으로 개인적으로 오페라 음악을 공부했으며, 성악경연대회인 콘코르소 인테르나티오날레에서 우승한 후 1961년 이탈리아의 레조 에밀리아에서 오페라 데뷔를 했다. 1968년 뉴욕 시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데뷔했으며, 1971년부터 그곳에 정규적으로 역을 맡았다. 오페라 청중 이외에도 연주회·음반·텔레비전 등을 통한 폭넓은 청중을 가졌고, 왕성한 활동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벨칸토 오페라 가수이며 최고 음역에서도 맑은 음색을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잘 알려진 오페라 역으로는 주세페 베르디의 〈리골레토 rigoletto〉에서 만토바 공작 역과 도니체티의 〈연대의 딸 la fille du régiment〉에서 토니오 역(특히 이 역은 일련의 높은 c음을 요구하는 어려운 역임), 벨리니의 〈청교도 i puritani〉에서 아르투로 역, 베르디의 〈아이다 aida〉에서 라다메스 역 등을 꼽을 수 있다.


베르디, giovanni boldini가 그린 초상화(1886), 로마에 있는 galleria ...
[초기생애와 작곡활동]

선술집과 잡화점 점원이었던 아버지 카를로 주세페 베르디는 무식했으며 아들을 끝까지 교육시키기에는 너무나 가난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인 아들 베르디는 부세토의 부유한 상인이며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안토니오 바레치의 주목을 끌어 그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파트보를 베끼고 오르간 연주자를 대신하는 일 이외에 베르디는 지방의 음악단체와 교회를 위해 소품을 작곡했다. 18세가 되자 바레치가 비용을 부담해 밀라노로 가서 음악원에 입학하려 했으나 나이가 많아 거절당했다. 그러나 3년간 밀라노에 머물면서 라 스칼라 극장의 일원이었던 음악가 빈센초 라비냐에게 배웠다. 1834년 부세토로 돌아온 그는 바레치의 후원으로 공석인 음악감독직을 얻으려 했으나 각기 후보를 내세우려는 성직자들 때문에 파당적인 논쟁이 뒤따랐다. 이러한 경험으로 베르디는 성직권위주의에 반대하고 부세토에 대해서도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음악감독에 임명되었으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1836년 베르디는 후원자의 딸 마르게리타 바레치와 결혼했다.


오페라 〈산보니파초의 백작 오베르토 oberto, conte di san bonifacio〉의 작곡을 계기로 1836년 다시 밀라노로 갔으나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려는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3년 후 이 작품은 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되어 크게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극장을 위한 3편의 오페라를 위촉받았다. 그중 첫번째 작품인 〈하루살이 임금님 un giorno di regno〉(1840 초연)은 오페라 부파(희극적 오페라)였는데 반응이 너무 나빠 1번의 공연으로 끝났다. 베르디는 당시 아내를 잃은 상태였고 그보다 1년 전에는 어린 아들을 잃었기에(부세토를 떠나기 전에 이미 한 아이를 잃었음) 실의에 빠져 있었으며, 그런 상황에서 오페라를 작곡할 수는 없었다. 라 스칼라 극장 감독은 계약에서 그를 풀어주었으나 베르디의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생각되자 곧 네부카드레자르 2세의 이야기를 각색한 오페라 대본을 그에게 다시 내밀었다. 처음에 베르디는 이 대본을 마지못해 읽었으나 포로로 잡힌 유대인들의 합창이 나오는 부분에 이르자 거부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작곡된 〈나부코 nabucco〉(1842)로 그의 명성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확고해졌다.


나부코에 출연한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라 스칼라 극장의 경영진이 〈오베르토〉의 공연 결정을 하도록 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녀는 한동안 추문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베르디의 2번째 부인이 되었다. 한때 도니체티의 여주인공을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판을 얻었으며, 함께 노래했던 테너 나폴레오네 모리아니의 정부였다. 그와의 사이에서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1명은 1853년까지 생존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결점들 때문에 그녀는 베르디와의 결혼을 주저했고, 베르디는 〈라 트라비아타〉에서 그녀를 모델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창녀' 비올레타로 그렸다. 그녀는 확실히 마음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베르디는 분단된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프랑스 시민이었던 그는(사실 그는 나폴레옹이 점령했던 지역의 프랑스인 서기에게 조제프 포르튀냉 프랑수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음)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는 밀라노에서는 여권을 소지한 외국인이었다. 〈나부코〉의 합창은 그에게 이탈리아의 염원을 대변하고, 오스트리아의 검열에 대항하게 하는 애국심을 일깨웠는지도 모른다.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기원하는 유대인들의 기도에서 이탈리아 민중들은 확실히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는 자신들의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 십자군 이야기를 그린 〈롬바르디아인 i lombardi〉(1843), 빅토르 위고의 원작을 각색한 〈에르나니 ernani〉(1844), 〈두 사람의 포스카리 i due foscari〉(1844), 〈잔 다르크 giovanna d' arco〉(1845) 등 그후 발표된 오페라들은 검열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한 극적 외관으로 내용을 감춤으로써 애국적 정서를 표현했다. 사르데냐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영도하에 이탈리아의 애국지사들이 통일 이탈리아의 독립을 성취하기까지 베르디(그의 이름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머리글자와 일치함)는 통일과 애국의 상징이 되었고, 상당 기간 예술적으로는 답보상태에 있게 된다.


〈맥베스 macbeth〉(1847)에서 베르디는 분명한 발전을 보여준다. 성서적인 주제에서 〈나부코〉의 웅장한 분위기를 만들었듯이, 이제 그는 셰익스피어 극의 비극적 주제에서 잠재해 있던 자신의 최고의 재능을 끌어냈다. 〈맥베스〉에는 진부하고 조잡한 면이 없지 않으나 강력한 힘이 있는 만큼 〈돈 카를로스〉·〈아이다〉·〈오텔로〉를 낳게 한 천재의 숨결이 숨어 있다.


이탈리아에서 베르디의 인기는 해외에서도 주목을 끌었다. 1846년 〈에르나니〉를 공연하기 위해 파리를 방문했으며, 다음해 런던에서는 실러의 〈군도 die räuber〉를 각색한 오페라 〈도둑들 i masnadieri〉이 초연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은퇴 후 노래를 가르치고 있던 스트레포니와 우정을 새롭게 다졌다. 친밀한 관계는 계속 발전되었고 그들의 결혼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지만, 그 둘 중 아무도 결혼이라는 형식에 구애되려 하지 않았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인 스트레포니는 자신이 베르디의 아내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스캔들로 고통받은 베르디는 산타가타에 스트레포니를 데려다놓은 것 때문에 전처의 아버지 바레치에게 힐책을 받았다. 산타가타는 부세토 근교에 있으며, 부자가 되어 이곳의 땅을 구입한 베르디는 만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베르디는 자신의 행동이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에는 자신의 교육에 도움을 준 부세토 지방에 정확하게 돈으로 보답했지만 그뒤 그 지방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자 그곳의 음악활동에 깊이 관여하기를 거절했다. 산타가타에 머문 지 7년이 지난 1859년 그와 스트레포니는 사보이에 있는 외딴 마을로 가서 교회와 국가의 규범에 따라 그들의 결합을 합법화했다.

[중기생애]

그러는 동안 그는 자신의 이름을 친숙하게 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3편의 오페라 〈리골레토〉·〈일 트로바토레〉·〈라 트라비아타〉를 작곡했다. 〈리골레토〉에서 그는 음악에 극이 밀착되어 나타나게 함으로써 발전을 이루었다.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구분도 거의 없어져 레치타티보는 아리오소(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중간 성격을 갖는 半선율적 악곡)의 경향을 띠게 되었고, 아리아도 엄격한 형식성에서 벗어나 앞선 부분이나 뒷부분과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었다. 이제 음악적 관심은 주로 일련의 2중창에 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리골레토〉에 나오는 유명한 4중창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4중창은 사실상 2중으로 구성된 2중창으로 한쪽에서는 질다와 리골레토의 2중창이, 또다른 쪽에서는 공작과 마달레나의 2중창이 동시에 불려진다. 격렬한 영웅적 행동이 묘사되어 있는 〈일 트로바토레〉는 또다른 종류의 음악을 들려준다. 열정적으로 분출되는 선율은 섬세한 면은 덜하지만 강력한 힘을 발산한다. 이와는 대조적인 양식으로 친밀한 분위기와 서정적인 정서를 그린 〈라 트라비아타〉는 진정 위대한 작품이다. 이러한 경향은 실러의 〈간계와 사랑 kabale und liebe〉을 각색한 〈루이자 밀러 luisa miller〉(1849)에서 이미 실험되었다.


이들 세 작품으로 얻은 생애 중반의 성공은 난관을 극복하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베르디는 검열관들에게 강한 혐의를 받고 있었으며, 〈리골레토〉의 모체가 되는 위고의 시극 〈임금님의 난행(亂行) le roi s'amuse〉은 정치적으로 금기시된 왕 살인미수 사건을 다루고 있었는데 그것은 왕권을 모독하는 저주와 다름없었다. 왕을 1단계 낮추어 공작으로 바꾸고 여러 가지 수정을 거친 후에야 그 대본은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라 트라비아타〉는 또다른 문제가 있었다. 알렉상드르 뒤마가 〈동백 아가씨 la dame aux camélias〉의 내용 때문에 파리에서 심각한 스캔들을 겪고 있었으므로 이를 오페라로 개작한 베르디의 작품은 처음에는 17세기 의상을 입고 공연되었다. 그러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역시 현실과 동떨어진 노래 주제로 일관한 이제까지의 오페라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드러냈다. 더욱이 건강한 프리마 돈나를 폐병 환자인 여주인공 역에 기용함으로써 베네치아에서의 초연은 여지없이 실패했다. 베르디는 이에 대해 평소 성격대로 간결하게 언급했다. "나의 잘못일까? 아니면 가수들의 잘못일까? 시간이 밝혀줄 것이다."


베르디는 이제 국제적인 명사가 되었으며 이러한 신분의 변화는 그의 예술에도 반영되었다. 1855~70년 주로 5막 구성에 발레를 포함한 화려한 오페라를 요구하는 파리인들의 기호에 맞는 작품을 파리 오페라단과 그밖의 극장들을 위해 만드는 데 몰두했다. 항상 후원자들이 요구하는 바를 기꺼이 제공하려 했던 양심적인 장인이었던 베르디는 비록 지나치게 화려한 것을 바라는 파리 오페라단의 요구에 고민했지만 마이어베어식의 규모를 따른 '그랑 오페라'를 작곡했다.


새로운 양식으로 작곡한 첫 작품 〈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 les vêpres siciliennes〉(1855)는 〈리골레토〉와 〈라 트라비아타〉의 음악적 질에 못 미치는 것이었다. 스크리브의 대본 역시 이 작품의 질에 영향을 끼쳤는데, 이 대본은 도니체티를 위해 쓴 것을 새로 단장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극장들을 위해 만든 2편의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 simon boccanegra〉(1857, 베네치아)와 〈가면 무도회 un ballo in maschera〉(1859, 로마)는 그랑 오페라의 영향을 덜 받은 작품이며, 인간 본성을 해석하고 관현악적 색채를 잘 구사하는 베르디의 풍부한 능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분위기가 침울하고 줄거리가 지나치게 복잡하지만 〈시몬 보카네그라〉는 대부분 초기 오페라들처럼 단지 선율에 의지하고 정서에 호소하는 극적 감동으로써가 아니라 등장인물에 대한 섬세한 연출로 주목을 끌었다. 스웨덴 왕 구스타프 3세 암살사건을 각색한 〈가면 무도회〉는 보다 나은 극적 요소가 잠재해 있었지만 다시 검열이 개입해 그 사건을 다루지 못하게 했으므로 결국 18세기의 스톡홀름에서 17세기의 청교도들이 거주하는 보스턴으로 무대가 옮겨지게 되었다. 이것이 베르디가 부딪친 마지막 외국 검열이었다. 1860년 이탈리아는 교황령에서 벗어나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되었고, 새로운 국가의 정치적 개척자였던 카보르 백작은 정치 세계 밖의 저명한 이탈리아인들로 구성된 의회를 구성하려는 열망을 가졌다. 베르디는 마지못해 하원에 출마하기로 동의하고 토리노에 있는 의사당에 출석하기는 했지만 정치권에서 능동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으며 1861년 카보르가 죽자 사임했다.


1862년 런던 박람회에서 이탈리아 작곡가들을 대표해서 시인이자 작곡가인 아리고 보이토의 가사로 칸타타를 작곡했다. 같은 해 그랑 오페라 〈운명의 힘〉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연되었고, 1867년에는 실러의 비극을 각색한 〈돈 카를로스〉가 파리 오페라단에서 공연되었다. 다시 세심한 인물 설정과 관현악 처리에서 발전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특징들은 〈아이다〉에서 최고조로 발휘되었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축하하기 위해 이집트 총독이 위촉한 이 작품은 1871년 카이로에서 초연되었다. 〈맥베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베르디는 이 작품을 위해 세부적인 시나리오를 썼다. 안토니오 기슬란초니가 그것을 운문 형태로 바꾸었으며 종종 베르디의 지시를 받았다.


1867년에 로시니가 죽자 베르디와 12명의 동료 작곡가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정신의 고향인 볼로냐에서 연주될 진혼곡을 위촉받았다. 그러나 그 계획은 주 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고, 베르디가 보기에는 이 작품의 지휘를 맡은 안젤로 마리아니도 이 일에 전념하지 않은 듯했다. 자신의 일이 방해받는 것을 참지 못했던 베르디는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지휘자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마리아니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로시니의 출생지인 페사로에서 있었던 로시니 기념제를 준비하고 감독하면서 베르디의 심사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분쟁은 베르디에게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하루살이 임금님〉을 거부했던 라 스칼라와 그 청중들을 평생 증오했듯이 그 불쌍한 친구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마리아니와의 불화는 그가 카이로에서 있었던 〈아이다〉 초연을 위한 지휘를 거절함으로써 더욱 깊어졌다. 그는 자신의 병을 이유로 들었고, 사실 암과 투병중에 있었으며 1873년 결국 숨을 거두었다. 베르디가 마리아니의 정부인 테레자 슈톨츠를 가로챘다는 비난을 퍼부은 피렌체 신문의 독설적인 중상모략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했다. 슈톨츠는 〈아이다〉가 이탈리아에서 공연되었을 때 아이다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마리아니가 죽고난 몇 년 후 그녀와 보다 친밀한 관계로 발전해 부인과의 사이에도 다소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1873년 베르디는 나폴리에서 〈아이다〉 공연을 기다리며 현악 4중주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성숙기에 작곡된 유일한 기악곡이다. 같은 해에 이탈리아의 애국 시인인 알레산드로 만초니가 죽자 진혼곡을 작곡했는데 로시니를 위해 작곡했던 진혼곡의 마지막 악장을 그 작품에 포함시켰다.

[후기의 대작들]

1870년대에 베르디는 그의 활동에 절정을 맞았으며, 일찍이 외국에서 공연했던 그의 오페라들은 검열없이 이탈리아에서 공연되었다. 그는 부세토 근교의 농장으로 은퇴해서 오페라 리허설에 기울였던 것 이상으로 농사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베르디의 악보를 출판했던 티토 리코르디는 가장 큰 돈을 벌어다주는 작곡가가 영예롭게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몇 년 전 젊은 패기로 베르디를 비평하고 공격했던 아리고 보이토의 협력을 얻었다. 보이토가 셰익스피어의 〈오텔로〉를 각색한다는 제안은 베르디의 마음을 끌었지만 그는 먼저 불만스러운 〈시몬 보카네그라〉의 대본을 개작해줄 것을 보이토에게 요청했다. 〈오텔로〉를 오페라로 만드는 계획은 구체화되었고 1887년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74세에 베르디는 이전의 그 어떤 대본들보다도 뛰어난 대본을 손에 넣었다. 〈오텔로〉의 극적 내용은 연속적이고 탄력적인 음악에 녹아들어 있었고, 그 음악은 등장인물의 모든 성격과 동작을 낱낱이 반영하고 있었다.


〈오텔로〉의 유럽 순회공연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 베르디는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었노라고 선언하고는 다시 한번 산타가타로 은퇴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원작으로 오페라 1편을 더 만들게 된다. 보이토는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 the merry wives of windsor〉에 〈헨리 4세 henry Ⅳ〉의 내용을 보충해 각색한 희가극 〈팔스타프〉의 대본을 만들었고, 베르디는 거기에 놀라울 정도로 빈틈없는 음악을 붙였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이 작품은 1893년 라 스칼라에서 공연되었고, 55년 전 같은 극장에서 맛보았던 참담한 실패를 설욕했다. 〈팔스타프〉 이후 베르디는 합창음악으로 관심을 돌려 〈아베 마리아 ave maria〉와, 단테의 〈신곡 paradiso〉에서 가사를 가져온 〈동정녀 마리아의 찬가 laudi alla vergine maria〉에 실험적인 곡을 붙이기도 했다. 그는 이 작품들은 〈슬픈 성모 stabat mater〉·〈주 찬양 te deum〉과 더불어 〈4곡의 교회 음악 quattro pezzi sacri〉이라는 제목으로 1898년에 출판하고 나서 더이상 작곡에 손을 대지 않았다. 1897년 부인의 죽음으로 오랜 동반자 관계가 깨어지게 되자 건강이 점차 악화되었으며, 부인이 죽은 지 4년이 채 못 되어 그 또한 세상을 떠났다.
[평가]

처음부터 베르디의 음악에는 청중이 단번에 새로운 대작곡가가 나타났음을 깨닫게 할 만큼 강한 개성과 감동적인 선율이 있었다. 그후 그는 점차 일류 예술가로 발돋움했고 결국 동시대에 바그너가 독일에서 했던 것처럼 오페라를 음악극(dramma per musica)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베르디의 업적은 바그너와는 구별되는데,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는 정규과정을 밟은 작곡가가 아니라 단지 경험이 많은 작곡가였다. 그는 실제적인 그 경험을 전적으로 극장에서 얻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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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2/06 [22:25]  최종편집: ⓒ 울산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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